"안녕하세요", "맛있어요"라며 밝게 웃으며 한국어로 인사하는 20대 식당 여종업원과 40대 생과일주스 노점상 아저씨. 지난 주말 대만의 수도 타이페이에서 마주친 한류의 현장이다. 2년전 베이징 올림픽 당시 대만 양수쥔(楊淑君)의 태권도 실격패 판정 후 일어난 대규모 반한 시위 상황을 비롯해 올해 초 타이완의 인기 코미디언 궈즈첸(郭子乾)이 TV에 나와 한국의 호텔에서 어처구니 없는 일을 겪었다며 한국인을 조롱하고 비하했던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던 터라, 대만 현지의 혐한(嫌韓) 열풍이 상당히 거셀 줄 알았다. 하지만 일본과 중국, 동남아시아 국가 중 최근 들어 가장 심상치 않았던 '혐한류'의 중심국가 대만에서 찾아본 '한류'는 여전했다. 게다가 드라마와 K팝 등 대중문화 일색이 아닌 음식과 패션 등 생활문화가 중심이 된 새로운 한류 문화라 좀더 느낌이 새로웠다.
대만은 식민지 시절부터 일본과 관계가 돈독해 일본문화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특히 헬로키티의 인기가 좋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사진은 공항 출국장 내 키티숍.
◇아픈 과거 앙금 딛고 새 역사 써나가는 옛 혈맹
타이페이 시내를 다녀보면 거의 모든 차가 도요타, 혼다, 미쓰비시 등 일본기업이 생산한 자동차다. 세계 4위의 생산량을 자랑는 현대.기아차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차가 일본을 제외한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중소형차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삼성 휴대폰도 보기 힘들다. 물론 대만에도 쟁쟁한 국산 메이커 HTC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이폰과 함께 세계 스마트폰 시장을 양분하다시피하는 갤럭시의 사용자가 드물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대만 국민들은 원래 일본 문화를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타이페이 시내 어딜가나 와타미 등 일본식 주점이나 다코야키 노점 등이 수두룩한 풍경은 서울의 풍경과도 비슷하다. 하지만 일본어 일색의 간판이며 서점가에 가득한 일본 잡지, 문고 등은 이곳이 과연 도쿄인지 타이페이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다. 특히 곳곳에 분홍색 '헬로 키티'숍이 있고, 심지어 대만 에바항공사는 '키티'로 래핑한 항공기를 띄우기도 했다.
반면 한국에 대해서는 다소 껄끄러운 분위기가 남아있다. 한때 서로 '혈맹'이라 부르며 똘똘 뭉쳤던 우방국이었지만, 1992년 한국이 중국(당시 중공)과 수교를 맺으며 대만과 단교했던 아픈 기억을 대만인들은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중국은 수교의 첫째 조건으로 대만과의 단교를 요구했고 당시 정권은 단교와 함께 '중국을 유일한 정부'로 인정했다. 당시 대만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김 모(46.여행사 운영)씨는 "서울 명동의 '자유중국 대사관'에서 청천백일기가 내려지고 중공의 오성홍기가 오르는 순간을 TV중계로 지켜보며 펑펑 울던 대만 국민들이 기억난다"며 "그러한 역사적 아픔이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들의 가슴에 흉터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게다가 한국과 대만은 메모리 반도체와 LCD 패널, 휴대전화 등 주요 전략 산업에서 경쟁관계에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기업의 두드러진 활약에 밀려 거의 도산 직전의 위기에 처한 대만 기업들의 자존심도 혐한 분위기에 한몫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대중문화에서 촉발된 한류의 거대한 물결은 상황을 많이 바꿔놓은 듯했다. 지난주 타이페이 시내에서 만난 대부분의 시민들은 기자에게 간단한 한국어로 말을 건네는 등 친절한 태도를 보였다. 호텔 로비에서 만난 한 젊은 대만인 남성은 박찬욱 감독과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줄줄 외웠다. 도심 거리에는 한국산 액세서리를 파는 '못된 고양이(淘氣猫)' 숍 등 한글간판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고, 딤섬으로 유명한 딘타이펑 본점 메뉴판에도 어김없이 한글 설명이 있었다. 한국식 그대로 놋쇠에 고기를 굽는다는 동판소육(銅盤燒肉)이란 이름의 불고기 한식당에는 대만인 손님들로 가득하고, 인근 커피숍에서는 한국유자차를 판다고 밖에 당당히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일본과자전문점이라고 간판을 내건 가게에는 백설 컵케이크가 맨앞에 진열되어 있고, 시내 도교사찰 룽산쓰(龍山寺)에는 '크라운 웨하스'가 시주되어 있을 정도다.
몸짱아줌마 정다연씨의 다이어트 책이 대만 건강서적 분야 베스트셀러 부문 2위에 당당히 올라있다.
대만의 서점에선 국내에서 시판중인 한글판 잡지도 실시간으로 쉽게 구할 수 있다. 아예 따로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압권은 '문화의 바로미터'라 불리는 서점. 타이페이 101빌딩과 W타이페이 호텔 사이 신이(Xinyi) 지구에 위치한 대형서점 청핑슈띠엔(誠品書店)은 한국으로 따지면 교보문고와 같은 곳이다. 24시간 영업을 하는 이 서점은 규모나 명성에서 대만 최고 서점으로 꼽힌다. 서점의 입구에는 베스트셀러를 집계해 전시해놓았는데, '몸짱 주부' 정다연 씨의 다이어트 서적이 건강분야 베스트 셀러 2위에 올라있엇다. 여행서 코너에는 서울, 부산 등 한국여행 관련 서적만으로 따로 매대를 꾸릴 정도로 많은 안내서들이 깔려있었고, 퀸, 레이디경향, 아레나, 에스콰이어 등 국내 잡지 역시 한글판 그대로 코너가 마련되어 있었다. 현재 대만에서의 한류는 대중문화 한류를 뛰어넘어 여러가지 생활 문화 전반에 걸쳐 맹위를 떨치며 과거의 앙금을 떨쳐내는데 큰 몫을 하고 있었다.